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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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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브르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1920년 프랑스 세브르에서 서명되었다.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고 군사력을 제한하며, 재정을 연합국이 통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 독립 전쟁 중 무효화되었으며, 1923년 로잔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조약에는 그리스, 아르메니아의 영토 할양, 쿠르디스탄 자치 지역 설정, 보스포루스 해협의 국제 관리 등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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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조약
지도 정보
조약 정보
명칭세브르 조약
정식 명칭연합국과 협상국, 오스만 제국 간 평화 협정
유형연합국의 오스만 제국 분할 협정
서명일1920년 8월 10일
서명 장소프랑스 세브르
발효 조건오스만 제국과 4개의 주요 연합국에 의한 비준
기탁자프랑스 정부
사용 언어프랑스어 (주 언어), 영어, 이탈리아어
관련 조약무드로스 휴전 협정
기타 정보
위키소스조약 전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条約彙纂第3巻第3部 對勃及對土平和條約竝關係諸條約.外務省条約局

2. 조약의 체결 과정

독일 제국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경제적 권리, 기업 투자를 포함한 모든 독일의 이권이 무효화되었다. 또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비밀스런 "삼자 조약"을 체결했다.[36] 이 조약으로 영국은 석유 및 상업권을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의 전 독일계 기업을 합병했다. 세브르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제국에게 부과된 조건보다 더욱 심각했다.[37][38]

협상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시작되었으나 15개월 간 중단되었다. 이후 1920년 런던 강화 회의에서 재개되어 1920년 4월 산레모 회의에서 조약 내용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다시 멈췄고, 1915년부터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계획은 강대국 간 합의 지연과 터키 민족주의 운동 부흥으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 세브르 조약은 터키 독립 전쟁으로 무효화되었고,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어 1924년에 비준되었다.

조약은 프랑스 세브르[39]의 세브르 도자기 공장 대표전시실에서 서명되었다.[40] 오스만 제국의 리자 테브픽 뵐루크바쉬, 그랜드 비지어 다마트 페리드 파샤, 대사 하디 파샤, 교육부 장관 레시드 할리 4명이 서명했고, 술탄 메흐메트 6세가 승인했다.

주요 연합국인 미국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조약에서 제외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1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상실한 아르다한, 카르스 주, 바투미를 반환받았다.

그리스는 국경 문제로,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에베티스 아로니안은 바툼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 조약에도 서명했지만, 이후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41]

연합국 대표들은 1920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산레모 회의에서 작성한 평화 조약 초안을 오스만 정부에 제출하고 한 달 안에 답변을 요청했다. 전직 대총리 테프빅 파샤는 이 초안이 "독립과 국가성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스만 정부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1920년 6월 25일 연합국에 권고안을 보냈으나, 연합국은 사소한 변경 외에는 어떠한 변경도 기대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10일 이내에 답변을 요청했다.

술탄 메흐메트 6세는 1922년 7월 22일 술탄 협의회를 소집하여 조약에 대한 책임을 넘기려 했다. 협의회는 연합국이 조약 초안에 대한 오스만의 유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전보 내용을 논의했고, 7월 20일 조약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발표했다. 다마트 페리트 파샤는 연합 진보 위원회의 10년간의 실수로 인해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연합국의 술탄에 대한 신뢰 덕분에 이스탄불은 여전히 터키인들에게 맡겨졌으며, 조약을 수락하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다. 투표 결과, 토프추 페리키 르자 파샤를 제외한 모든 대표가 조약 서명을 지지했다.[9]

3. 조약의 서명자

오스만 제국에서는 리자 테브픽 뵐루크바쉬, 대재상 다마트 페리드 파샤, 대사 하디 파샤, 교육부 장관 레시드 할리 4명이 서명했으며 술탄 메흐메트 6세가 승인했다.[9]

세브르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 대표단: ''왼쪽부터'' 리자 테브픽 뵤륑바시, 대총리 다마트 페리드 파샤 (페즈를 착용), 오스만 제국 교육부 장관 메흐메트 하디 파샤, 그리고 대사 레샤트 할리스


영국은 조지 딕슨 그레이엄이, 프랑스는 알렉상드르 밀레랑이, 이탈리아는 레리오 롱가레 백작이 서명했다. [11] 그리스는 국경 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고[41],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에베티스 아로니안은 1918년 6월 4일 바툼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 조약에도 서명했다.

주요 연합국 중 하나였던 미국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국제 연맹 위임 통치를 상원에서 거부하면서 조약에서 제외되었다.[14]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과 이미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에 조약 당사국이 아니었다.[11]

오스만 제국 측 서명자는 다음과 같다.

# 전 대사 하디 파샤

# 전 교육부 장관 리자 테브픽 뵤륑바시

# 베른 주재 오스만 제국 대사관 2등 서기관 레샤트 할리스.

대총리 다마트 페리드 파샤는 협상에는 참석했지만 조약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4. 조약의 내용


세브르 조약에 따른 오스만 제국의 분할 및 그리스-이탈리아 조약

5. 조약의 주요 조항

세브르 조약,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간 체결[10]
부분조항
I국제 연맹 규약1-26
II터키 국경27-35
III정치 조항36-139
IV소수 민족 보호140-151
V군사, 해군 및 공군 조항152-207
VI전쟁 포로 및 묘지208-225
VII벌칙226-230
VIII재정 조항231-260
IX경제 조항261-317
X항공 항행318-327
XI항구, 수로 및 철도328-373
XII노동 (베르사유 조약 제XIII부)374-414
XIII기타 조항415-433



이 조약은 터키에 여러 영토적 손실을 부과했으며, 터키에 속한 것으로 인정된 영토에 적용되는 여러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6. 오스만 제국 내부의 논의

1920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산레모 회의에서 연합국 대표들은 평화 조약 초안을 오스만 정부에 제출하고 한 달 안에 답변할 것을 요청했다. 대총리를 지낸 테프빅 파샤는 이 초안이 "독립과 심지어 국가성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7] 오스만 정부는 초안 수정안을 제시했으나, 연합국은 이를 거부하고 10일 이내에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7]

메흐메트 6세는 조약 승인에 대한 책임을 넘기기 위해 1922년 7월 22일 술탄 협의회를 소집했다.[8] 협의회에는 정부 구성원, 상원 의원, 전직 대총리, 고위 장교, 율마와 관료들이 초청되었지만, 터키 민족 운동 관련 정치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8]

협의회에서는 연합국이 조약 초안에 대한 오스만의 유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보를 논의했고, 결국 조약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9] 다마트 페리트 파샤는 연설에서 조약 수락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다.[9] 무스타파 사브리 에펜디, 하디 파샤 등도 조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투표 결과, 토프추 페리키 르자 파샤가 기권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대표가 조약 서명에 찬성했다.[9]

7. 조약의 당사국

세브르 조약은 프랑스 세브르[39]의 세브르 도자기 공장 대표 전시실에서 서명되었다.[40]

|thumb|upright|세브르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 대표단: ''왼쪽부터'' 리자 테브픽 뵤륑바시, 대총리 다마트 페리드 파샤 (페즈를 착용), 오스만 제국 교육부 장관 메흐메트 하디 파샤, 그리고 대사 레샤트 할리스

이 조약에는 영국의 조지 딕슨 그레이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밀레랑, 이탈리아의 레리오 롱가레 백작이 서명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리자 테브픽 뵐루크바쉬, 그랜드 비지어 다마트 페리드 파샤, 대사 하디 파샤, 교육부 장관 레시드 할리 4명이 서명했으며, 메흐메트 6세 술탄이 승인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1918년 오스만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상원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국제 연맹 위임 통치를 맡는 것을 거부하여 오스만 제국의 분할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4]

그리스는 1920년 그리스 총선 이후의 정치적 변화 때문에 그려진 국경을 받아들이지 않아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11]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에베티스 아로니안은 1918년 6월 4일 바툼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 조약에도 서명했다.

8. 조약의 상세 내용



이 조약은 터키에 여러 영토적 손실을 부과했으며, 터키에 속한 것으로 인정된 영토에 적용되는 여러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의 재정을 통제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국가 예산 승인 및 감독, 재정 법률 및 규정 시행, 그리고 오토만 은행의 완전한 통제를 포함했다. 1881년 설립된 오스만 공공채무 관리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채권 보유자들만 포함하도록 개편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부채 문제는 크림 전쟁(1854–1856) 당시, 주로 프랑스로부터 해외 차관을 빌린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1914년 탈라트 파샤에 의해 폐지되었던 오스만 제국 조약권이 복원되었다.

제국은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사람, 물품, 선박 등에 대한 통행의 자유를 허용해야 했고, 통과하는 물품은 모든 관세가 면제되었다. 세금 제도, 관세 제도, 내부 및 외부 차관, 수출입 관세 및 특허권에 대한 미래의 변경 사항은 연합국 재정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시행될 수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또는 불가리아의 경제적 재진출을 막기 위해, 조약은 제국에 그들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그들 국가 시민의 재산을 청산하도록 요구했다. 공공 청산은 배상위원회에 의해 조직될 예정이었다. 바그다드 철도의 재산권은 독일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50,700명으로 제한되었고, 오스만 해군은 슬루프 7척과 어뢰정 6척만을 보유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공군 창설이 금지되었다. 이 조약에는 군사 조항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한 연합군 통제 및 조직 위원회가 포함되었다.

이 조약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한 책임자를 규명하는 것을 요구했다. 세브르 조약 제230조는 오스만 제국이 "1914년 8월 1일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영토에서 전쟁 기간 동안 자행된 학살에 대한 책임자로 연합국이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합국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세브르 조약이 요구한 대로 전범을 기소하려는 연합국 재판 시도는 결국 중단되었고, 대학살을 기획한 자들은 기소를 피하고 유럽중앙아시아 전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했다.[16]

오스만 제국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강제 추방된 사람들을 본래의 거주지로 돌려보내며, 이전에 몰수되었던 재산을 회복시켜야 했다. 1914년 11월 1일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모든 경우는 무효화되어야 했다.[17]

세브르 조약과 영향권


터키가 조약에 따라 유지한 영토 내에서 프랑스는 시리아와 남동부 아나톨리아의 인접 지역(가지안테프, 우르파, 마르딘 포함)을 할양받았다. 킬리키아(아다나, 디야르바키르와 북쪽으로 시바스토카트까지 이어지는 아나톨리아 중동부의 광대한 지역 포함)는 사이क्स-피코 협정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권으로 선포되었다.

섬유
|thumb|upright=1.3|1832년부터 1947년까지 그리스의 영토 확장. 노란색 영역은 세브르 조약에 따라 그리스에 할당되었지만 1923년에 상실된 지역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정부는 1919년 5월 21일부터 스미르나 점령을 관리했고, 1922년 7월 30일에는 보호령이 수립되었다. 이 조약은 "그리스의 주권 행사를 지역 의회에 이양"했지만, 그 지역은 오스만 제국 내에 남아 있었다. 이 조약은 스미르나를 지역 의회가 관리하고, 5년 후 국제 연맹의 감독하에 스미르나 시민들이 그리스에 합류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만 제국에 남을 것인지 결정하는 주민 투표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이 조약은 스미르나 지역에 대한 그리스의 행정을 인정했지만, 그 지역은 여전히 터키의 주권하에 있었다. 터키의 불규칙군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군은 인근 도시들까지 관할권을 확장하여 소위 "스미르나 지역"을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1911년에서 1912년까지의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도데카니사 제도를 공식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이 제도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던 우시 조약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아나톨리아 남부와 중서부의 상당 부분, 안탈리아 항구 도시와 셀주크 왕조의 역사적 수도인 코니아를 포함한 지역은 생장드모리엔느 협정에 따라 이탈리아의 영향권으로 선포되었다. 안탈리아 주는 런던 조약에서 삼국 협상국에 의해 이탈리아에 약속되었으며,[18] 이탈리아 식민 당국은 이 지역을 리키아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19]

1920년 서부 터키 지도, 세브르 조약의 해협 지대 표시


해협 지대는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항해는 평화 시나 전시 모두를 막론하고 모든 상선과 군함이 국기를 불문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할 수 있도록 열려 있을 것이다. 이는 해당 수역의 국제화로 이어질 것이며, 해당 수역은 봉쇄의 대상이 되지 않고, 국제 연맹의 결정을 집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전쟁 행위도 행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특정 항구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항구로 선포될 예정이었다. 국제 연맹은 특히 요금과 시설과 관련하여 그러한 항구에서 완전한 자유와 절대적인 평등한 대우를 고집하여 상업적으로 전략적인 장소에서 경제적 조항이 이행되도록 했다. 이 지역은 "자유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항구는 이스탄불(예실쾨이에서 돌마바흐체 궁전까지), 하이달파샤, 이즈미르, 이스켄데룬, 하이파, 바스라, 트라브존바투미였다.

동트라키아(차탈자 선까지), 임브로스섬과 테네도스섬, 그리고 마르마라 해의 섬들은 그리스에 할양되었다. 섬 주변 해역은 국제 해역으로 선포되어 해협 지역의 관리 하에 놓였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의 독립 쿠르디스탄(1920년)에 대한 조항


모술 주를 포함한 쿠르디스탄 지역은 그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쿠르드족 정착 지역과 지역의 정치적·행정적 경계 간의 차이로 인해 쿠르디스탄의 국경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쿠르드족 내부의 일반적인 합의는 없었다.[20] 쿠르디스탄을 하나의 실체로서 개념화한 윤곽은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쿠르디스탄 향상 협회를 대표한 셰리프 파샤가 제안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역의 경계를 정의했다.

반주를 제외했기 때문에(아마도 그 지역에 대한 아르메니아인의 주장에 대한 양보로) 다른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에민 알리 베디르 칸은 반과 현재 터키의 하타이 주를 통한 바다로의 출구를 포함하는 대안 지도를 제안했다.[22]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족 대표단의 공동 선언 가운데 에르주룸 주와 사순에 대한 쿠르드족의 주장은 철회되었지만, 아그리와 무쉬에 대한 주권에 대한 주장은 남아 있었다.[23]

세브르 조약은 현재 터키 영토에 있는 축소된 쿠르디스탄을 윤곽으로 제시했으며(이란의 쿠르드족, 영국이 통치하는 위임통치령 이라크, 프랑스가 통치하는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제외) 어떤 제안도 승인하지 않았다.[24] 현재 이라크-터키 국경은 1926년 7월에 합의되었다.

제63조는 아시리아인 소수 민족에게 완전한 안전과 보호를 명시적으로 부여했지만, 그 조항은 로잔 조약에서 삭제되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정의한 서쪽 국경을 가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아르메니아는 6조 "아르메니아", 88-93조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았다. 89조에 따르면, "터키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다른 고위 조약 당사국들은 에르주룸, 트라브존, 반, 비틀리스 주에서 터키와 아르메니아 사이에 설정될 국경 문제를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제출하고, 그의 결정과 아르메니아의 해양 접근 및 상기 국경에 인접한 터키 영토의 일부 비무장화에 관한 그의 규정을 수용하는 데 동의한다."

이 조약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간의 국경은 해당 국가들 간의 직접 협상을 통해 결정되며, 해당 국가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주요 연합국들이 결정한다고 명시했다.[25]

1920년 4월 25일 산레모 회의에서 이라크 영국 위임통치령에 관한 조약 세부 사항이 완료되었다. 이 지역의 석유 채굴권은 모술 주에 대한 채굴권을 보유했던 영국이 통제하는 터키 석유 회사(TPC)에 주어졌다. 영국과 이라크 협상가들은 새로운 석유 채굴권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제 연맹은 모술의 처분에 대해 투표했고, 이라크인들은 영국의 지원 없이는 모술 지역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1925년 3월, TPC는 "이라크 석유 회사"(IPC)로 이름이 바뀌었고 75년 동안 완전한 채굴권을 부여받았다.

영국의 발포어 선언이 팔레스타인에 관해 제시한 세 가지 원칙은 세브르 조약에 채택되었다.

1921년 앙카라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터키에 할양한 시리아 북부 산작(노란색 음영 지역). 주황색 선은 세브르 조약의 국경을 나타냅니다.


프랑스 위임통치는 산레모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는 동쪽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시리아 사막, 서쪽의 지중해 사이의 지역을 포함하며, 북쪽의 누르 산맥에서 남쪽의 이집트까지 확장되었다. 이는 레바논과 확장된 시리아를 포함하여 약 약 155398.51km2의 면적과 약 3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지역이었다. 두 지역 모두 나중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으로 재할당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은 5개의 지역으로 나누었다. 유프라테스 지역에서 지중해까지, 자치령인 알렉산드레타 산작(오늘날의 하타이 주)을 포함한 알레포 주;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하우란을 포함한 다마스쿠스 주; 트리폴리에서 팔레스타인까지 확장된 대레바논; 알렉산드레타 산작과 대레바논 사이의 해안을 포함하는 알라위트 주; 아스-수웨이다 시 주변의 자발 드루즈 주. 1920년 3월 다마스쿠스에서 시리아 국민 의회에 의해 시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던 페이살 1세는 같은 해 7월 프랑스-시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다음 해 그는 이라크 왕이 되었다.

국가면적 (km²)
오스만 제국약 452986.67km2
윌슨 아르메니아약 155398.51km2
시리아약 352236.63km2
독립 쿠르드 국가약 370366.46km2
헤자즈약 258997.52km2
아시르약 90649.13km2
예멘약 194248.14km2


9. 조약의 폐기

세브르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독일 제국에 부과한 조건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을 오스만 제국에 부과했다.[26][27]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은 1915년 초부터 비밀리에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공개 협상은 15개월 이상 진행되었으며,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시작되어 1920년 2월 런던 회의에서 계속되었고, 1920년 4월 산레모 회의 이후에야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지연은 강대국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터키 민족 운동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 지휘하의 터키 민족 운동은 이스탄불에 본거지를 둔 군주제와 결별했고,[28] 1920년 4월 앙카라에 터키 대국민의회를 설립했다. 앙카라 정부는 조약 초안의 준비와 이스탄불 정부의 수락을 면밀히 감시했다. 1920년 6월 7일, 대국민의회는 1920년 3월 16일 이후 이스탄불 정부가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이스탄불 점령).[8]

1920년 10월 18일, 다마트 페리드 파샤 정부는 아흐메트 테브픽 파샤가 대총리로 임명된 임시 정부로 대체되었으며, 그는 국민 통합이 달성되면 상원을 소집하여 세브르 조약을 비준할 의향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무스타파 케말의 협력을 구해야 했는데, 그는 조약에 대해 멸시를 표명하고 군사 공격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터키 정부는 협상국에 조약 비준이 당시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통고를 발표했다.[29]

결국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시 연합국 대부분을 로잔에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도록 강요했다. 세브르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터키 독립 전쟁 이후 세브르 조약의 대부분 서명국들은 1923년과 1924년에 로잔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아나톨리아에서의 조약에 대한 무장 반대 외에도,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모술 주변의 터키인들은 영국을 공격했으며, 아랍인들은 바그다드에서 영국의 지배에 맞서 무기를 들었다. 이집트에서도 혼란이 있었다.

10. 이후의 조약

터키 독립 전쟁 동안 터키군은 그리스, 아르메니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국가 협약에 명시된 대로 오늘날 터키와 유사한 영토에 대한 독립을 쟁취했다.

터키 민족 운동은 1921년 3월 16일 소비에트 러시아와 모스크바 조약을, 프랑스와는 앙카라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와는 알렉산드로폴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동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관계를 발전시켰다.

1922년 9월 차낙 전쟁에서 해협 중립 지대를 둘러싼 영국과의 갈등은 가까스로 피했고, 10월 11일 무다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1922년 11월 터키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 협상은 1923년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고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의 광대한 영토를 터키에 반환하는 로잔 조약으로 이어졌다. 로잔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영향권 대신 경제적 상호 작용 지역만을 확보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국제 도시가 되지 않았고, 터키와 불가리아 사이에는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다.[30]

11. 초기 가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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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Wikisource Wikisource: Treaty of Sèvres/Protocol
[2] Category Category: World War I treaties
[3] 서적 From Paris to Sèvres: The 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 at the Peace Conference of 1919–1920 https://archive.org/[...] Ohio Stat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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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Saltanat Şûrâsı https://ataturkansik[...]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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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스 The Times (London) 192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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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Kurdish Notables and the Ottoman State: Evolving Identities, Competing Loyalties, and Shifting Boundaries SUN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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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23] 서적 Batı Ermenistan ve Jenos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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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British Miscalculations: The Rise of Muslim Nationalism, 1918–1925 Transaction Publishers
[27] 서적 The Fate of Nations: The Search for National Security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 서적 Osman's Dream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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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강연 Pyrrhic Victory Achieved 2016-10-11
[31] 조약 Section III Articles 62� 64
[32] 웹사이트 [[国際水路機関]]の前身。
[3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4-10-09
[34] 참고자료 See: Sykes-Picot
[3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nzhistory[...] 2014-10-09
[36] 뉴스 ''The Times'' (London), Editorial The Times 1928-01-30
[37] 서적 British Miscalculations: The Rise of Muslim Nationalism, 1918–1925 Transaction Publishers
[38] 서적 The Fate of Nations: The Search for National Security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39] 웹인용 The Treaty of Sèvres, 1920 http://net.lib.byu.e[...] Harold B. Library, 브리검영 대학교
[40] 서적 From Paris to Sèvres: The 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 at the Peace Conference of 1919–1920 https://archive.org/[...] Ohio State University Press
[4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2.mfa.gr/N[...]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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